영화감상 - 질투의 모습을 한 사랑 (폴 토머스 앤더슨의 <리커리쉬 피자>를 보고)

2023.09.30

리커리쉬 피자를 보는 동안 제게 와닿았던 감정은 질투였습니다. 개리는 알라나가 만나는 다른 남자에게, 알라나 또한 개리가 키스하는 다른 여자에게, 심지어는 유치한 사업에 질투를 느낍니다. 질투라는 감정이 제게 자리 잡으면서, 질투를 중심으로 리커리쉬 피자를 감상하자, 저는 그들의 질투는 그들이 사랑하는 무의식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 자신도 그것을 깨달으면서 서로에게 달려간 채로 영화가 끝이 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 리커리쉬 피자는 ‘질투의 모양을 하고 있는 귀엽고도 진실된 사랑과 그것을 알라나와 개리가 깨달아가는 과정” 이라고 요약할 수 있고, 그 깨달음이 이 영화를 성장물로 정의할 수 있게 합니다.

리커리쉬 피자는 주인공인 알라나와 개리가 알라나는 자신이 일할 기회를 찾아, 개리는 흥미를 자극하는 사업 기회들을 좇는 과정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는 구조로 기본적인 서사가 진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석유 금수 조처 같은 시대상이 물침대 사업을 좌절시키고 다음 사업으로 서사를 진행시키는 도구로써 영리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알라나는 극의 처음에 아이들의 졸업 사진을 찍는 사진사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25살의 알라나는 어른이긴 하지만 아직 완전히 어른은 아닌 시기에 있고, 여전히 아이 근처에 머무르며 생활했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 덕에 15살 아이인 개리와 마주칩니다. 하지만 알라나는 아이다운, 나쁘게 말하면 철없는 자신의 모습에 컴플렉스가 있고 이에서 벗어나려고 하며 어른스러운 것을 동경하고 숭상합니다.

그래서 알라나에게 첫눈에 반해 다가오는 개리를 알라나는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신의 콤플렉스인 아이다움이 눈에 밟힙니다. 그래서 알라나는 개리를 애 취급하며 밀어내고 더 어른스러워보이고 관능적인 랜스에 끌립니다. 개리는 랜스를 질투하고, 자신이 팔던 물침대를 보러 온 수와 어울립니다.

그렇게 알라나와 개리는 서로와 솔직하게 결합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만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저는 그게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증거처럼 보였습니다. 개리가 수와 키스하고, 그걸 본 알라나는 다시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키스하고, 개리는 알라나에게 접근하는 존을 질투해서 그의 페라리를 부수고, 알라나는 다시 개리와 정반대로 나이든 잭을 만나면서 서로 질투를 교환합니다. 알라나는 핀볼 같은 유치한 사업에 몰두하는 개리를 폄하하고 막으려 하지만, 사실 이건 핀볼 머신이 아니라 쿨하고 어른스러운 자신을 봐달라는 것이고, 개리가 나 아니면 알라나 너는 애들 사진이나 찍어주고 있을 것이다라며 응수한 것은 나는 너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니 그런 나를 인정해달라는 뜻입니다. 이것 또한 어떻게 보면 또다른 형태의 질투이고 인정 투쟁입니다. 하지만 인정의 주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투쟁이 이 정도로 절실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투와 인정 투쟁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알라나가 만나는 남자들이 속삭이는 말은 달콤하고 가시가 없습니다. 좋게 들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진실하지 못하다는 게 명백합니다. 존 피터스는 아무 여자에게 접근하는 남자이고, 잭은 옛 영광에 취해있는 늙은 배우에 불과합니다. 존 피터스든 잭이든 알라나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겠다, 운전 솜씨가 정말 좋다는 둥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만, 질투가 없기에 그들의 사랑은 절실하지 않고, 일회적이며, 거짓되었습니다. 존 피터스는 맘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능글 맞게 말을 걸고, 잭은 자신이 찍은 영화의 명장면을 재연하느라 알라나가 오토바이에서 떨어지든 말든 안중에도 없습니다. 젠틀한 웍스에게 끌리지만 그는 자신과 이어질 수 없는 타입인데다가 데이트 상대보다는 자신의 일을 더 중시하는 사람의 타입으로 진실된 사랑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려는 알라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질투와 투쟁을 피해 달콤한 사랑과 기회를 찾아 떠난 개리와 알라나가 질투로 가려진 서로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위험이 닥치고, 숨겨진 진심이 질투라는 방어기제를 압도하는 것이 달리기로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개리가 경찰에 부당하게 끌려갔을 때 알라나가 달려왔고, 알라나가 잭의 오토바이에서 떨어졌을 때 잭은 달려나갑니다. 경찰서 출입문 유리 너머로 안도한 알라나와 개리가 오래토록 안고 있는 장면은 그들이 맞이할 결말에 대한 전주곡입니다. 달리는 장면은 이 이전에도 여러 형태로 반복/변주되고, 극의 마지막에서는 플래시백된 이전의 달리기와 서로를 향한 달리기가 겹쳐지면서 마무리됩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절실한만큼 빠르게 달리고, 그래서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사랑스럽게 부딪히며 극은 끝납니다.

알라나와 개리가 서로 질투하고 다투며 우여곡절 끝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통해 리커리쉬 피자는 사랑은 본질적으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다정함이 아니라, 볼품없고 가시 돋친 질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랑스럽게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Profile picture

김재성 인스타그램 책, 영화, 인문/사회, 소프트웨어 등을 소재로 가끔씩 글을 씁니다.

© 2024, 이 블로그의 소스 코드는 깃허브에 공개되어 있습니다.